- 75.4%에서 60% 안팎으로…성장의 그늘에서 얇아진 대한민국의 허리
- 소득통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중산층 복원은 ‘국민의 지갑’을 다시 채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유동기 발행인 및 칼럼리스트)
한 사회의 번영과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는 가장 정직한 척도 가운데 하나는 중산층의 두께다.
중산층은 내수를 떠받치는 실질적 소비 주체이자, 빈부격차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는 완충지대다. 동시에 극단적인 정치·사회적 분열을 억제하고 건강한 시민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기반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대한민국이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중산층의 구조적 쇠락’이라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면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며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사회구조 역시 허리가 두꺼운 ‘다이아몬드형’에 가까웠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흔들리고 노동시장과 자산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허리는 점차 얇아졌고, 상층과 하층이 확대되는 ‘모래시계형 구조’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30년간 이어진 중산층의 계단식 하락
중산층의 약화는 단순한 심리적 현상만은 아니다.
OECD가 2014년 한국 경제보고서에서 인용한 자료를 보면, 중위소득의 50~150%를 중산층으로 정의했을 때 한국의 중산층 비율은 1990년 **75.4%**였다.
2000년에는 71.7%, 2010년에는 **67.5%**로 낮아졌다.
20년 동안 7.9%포인트가 감소한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중위소득 50% 미만 저소득층 비율은 7.1%에서 9.3%, 다시 12.5%로 증가했다.
중산층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저소득층 비중이 확대됐다는 것은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국민 모두가 성장의 과실을 동일하게 누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후 공적연금과 복지, 이전소득 확대 등으로 소득분배 지표가 개선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특정 연도의 중산층 비율이 몇 퍼센트인가가 아니다.
오늘날 국민이 느끼는 ‘중산층다운 삶의 안정성’ 자체가 크게 약화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통계적 중산층과 체감 중산층은 다르다
중산층을 논할 때 먼저 통계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봐야 한다.
한국의 과거 분석에서는 중위소득 50~150% 구간을 중산층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널리 사용됐다.
다만 OECD가 언제나 50~150%만을 공식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OECD의 2019년 대표 보고서 Under Pressure: The Squeezed Middle Class에서는 중위 균등화 가처분소득의 **75~200%**를 중간소득층으로 정의했다.
기준의 범위는 다르지만 핵심 원리는 같다.
전체 국민을 소득순으로 세웠을 때 ‘중위소득과 비교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기준으로 중산층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국가 간 소득분포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민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훨씬 복잡하다.
내 집이 있는가.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은 얼마나 남았는가.
안정된 직장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자녀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가.
가족이 갑자기 아프거나 실직하더라도 버틸 금융자산이 있는가.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런 조건은 단순한 소득순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통계적 중산층’과 ‘체감 중산층’의 분리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월급을 받아도 삶의 수준은 완전히 다르다
월소득 500만원을 버는 두 가구를 예로 들어보자.
한 가구는 부채 없는 주택을 보유하고 있고 자녀 교육비 부담도 크지 않으며 일정한 금융자산과 노후자금을 갖고 있다.
다른 가구는 같은 500만원을 벌지만 전세대출이나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고 있고 두 자녀의 사교육비를 부담하며 별도의 노후자산도 거의 없다.
소득통계상 두 가구는 동일한 계층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삶의 안정성은 전혀 다르다.
바로 여기에 기존 중산층 통계의 한계가 있다.
소득이 계층을 설명하던 시대에서 자산·부채·비용이 계층을 결정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대기업은 성장했는데 왜 국민의 지갑은 얇아졌는가
대한민국은 외환위기 이후에도 빠르게 성장했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등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등장했고 한국은 세계 주요 경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국민 상당수는 국가와 기업이 성장한 만큼 자신의 삶이 좋아졌다고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런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기업의 성장과 가계의 경제적 안정 사이의 연결고리가 과거보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성장하면 국내 공장을 확충하고 인력을 대규모로 채용하면서 협력업체와 지역경제까지 파급효과가 이어지는 구조가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하고 해외 생산시설을 확대하며 자동화와 인공지능을 빠르게 도입하고 있다.
기업의 생산성과 이익이 증가한다고 해서 같은 비율로 국내 고용과 가계소득이 증가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성장의 방식 자체가 달라노동시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중산층의 사다리를 약화시켰다
두 번째 문제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다.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과 고용 안정성 격차가 커졌다.
일부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안정적인 일자리는 높은 임금과 복지를 유지하지만 중소기업·비정규직·플랫폼노동 등에서는 소득과 고용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과거 중산층을 만들어 냈던 가장 중요한 동력은 ‘양질의 안정적 일자리’였다.
열심히 일하면 임금이 오르고, 그 임금으로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교육하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다는 기대가 존재했다.
그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도 함께 약해졌다.
소득보다 더 빨리 오른 필수생활비
세 번째 문제는 중산층이 반드시 부담해야 하는 비용의 증가다.
주택가격과 전·월세, 교육비, 식비, 교통비, 보험료와 같은 필수생활비가 오르면 명목소득이 늘더라도 실제 생활수준이 개선되기 어렵다.
특히 부동산 문제는 오늘날 중산층을 나누는 결정적인 기준이 됐다.
주택을 일찍 마련한 가구와 무주택 가구, 부모로부터 자산을 지원받은 가구와 그렇지 못한 가구의 경제적 위치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같은 직장, 비슷한 연봉을 받으면 비슷한 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언제 집을 샀는지, 얼마의 부채가 있는지, 부모로부터 자산을 이전받았는지가 월급 차이 이상으로 계층을 결정한다.
교육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계층 유지비용’이다
한국에서 중산층의 부담을 이야기할 때 사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2024년 초·중·고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80.0%**에 달했다.
사교육을 더 이상 일부 상류층의 선택적 소비라고만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 교육이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자녀가 부모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거나 최소한 현재의 계층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투자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육비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계층 유지비용’의 성격을 갖는다.
주거비에 교육비, 보험료, 통신비, 자동차 유지비, 대출상환액과 노후 준비까지 더하면 통계상 중산층에 속하는 가구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은 많지 않다.
국민이 느끼는 계층은 연봉이 얼마인가보다 필수지출을 모두 하고 얼마가 남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자영업 과밀화도 중산층 붕괴를 가속했다
중산층 약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영업 문제다.
직장을 조기에 떠난 사람들이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이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음식점, 소매업, 서비스업 등에 몰리는 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소비 여력이 충분히 늘지 않는 상태에서 자영업자가 과도하게 증가하면 결과는 과당경쟁이다.
매출은 나뉘고 임대료와 인건비, 이자는 올라간다.
사업 실패가 곧 개인의 부채로 이어지고, 오랜 기간 축적한 퇴직금과 자산까지 소진하면 중산층 가구가 빠르게 하층으로 이동하게 된다.
자영업 문제는 단순한 업종 경쟁 문제가 아니라 중산층의 마지막 안전망이 무너지는 문제로 봐야 한다.
이제 ‘얼마를 버는가’만 물어서는 안 된다
중산층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중산층은 단순히 소득분포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노동으로 안정된 주거를 유지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적절한 문화와 여가생활을 누리고, 예상하지 못한 질병이나 실직에 대응하고, 은퇴 이후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대한민국도 기존의 소득 기준 중산층 지표와 함께 ‘체감 중산층’ 또는 ‘실질 중산층’을 측정하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가처분소득뿐 아니라 순자산, 주거비 부담, 부채상환 능력, 교육비 부담, 고용 안정성, 금융자산, 노후 준비 수준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결국 새로운 중산층 지표가 답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이 가구가 현재의 생활수준을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를 측정해야 한다.
허리가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지난 30년의 경험은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세계적인 대기업이 많아지는 것만으로 국민의 삶이 자동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기업의 성장만큼 중요한 것이 가계의 성장이다.
가계가 소비할 여력이 있어야 내수가 살아나고, 안정된 중산층이 두꺼워져야 사회갈등도 완화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노력으로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회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제 국가 운영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기업이 얼마를 벌었는가, GDP가 얼마나 증가했는가만을 성장의 척도로 삼아서는 부족하다.
국민의 가처분소득이 얼마나 늘었는가.
주거와 교육에 들어가는 필수비용은 얼마나 줄었는가.
가계부채 부담은 얼마나 낮아졌는가.
양질의 일자리가 얼마나 늘어났는가.
그리고 평범한 국민이 자신의 노력으로 중산층에 진입할 가능성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중산층은 한 국가의 허리다.
허리가 무너지면 내수가 무너지고 사회적 갈등이 커지며 미래에 대한 희망도 사라진다.
대한민국이 다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큰 기업과 더 높은 GDP만이 아니다.
일하는 국민의 지갑을 두껍게 만들고, 무너진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하며, 평범한 국민이 노력하면 다시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되살리는 것.
바로 그것이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정책이 향해야 할 방향이다.





